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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대통령, EU 차관 거부하고 금 거래 승부수…내각 "투기" 반발

윤영훈 기자

입력 2026.03.0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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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산 무기 구매 조건 '세이프' 대신 중앙은행 연계 독자 자금조달 추진…외무장관 "금값 변동 리스크 큰 도박"

사진=Gemini

폴란드가 유럽연합(EU)이 지원하는 대규모 방산 대출 프로그램을 거부하고, 중앙은행의 금 보유고를 활용해 독자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무기 구매처를 유럽산으로 한정하는 EU의 조건에 반발한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조치로, 폴란드 행정부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모양새다.

폴란드 PAP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EU의 대출 프로그램인 '세이프(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를 대체할 독자적인 자금 조달책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군 장비 도입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안"이라며 이자 비용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계획을 '폴란드 세이프 0%'로 명명했다.

앞서 폴란드 정부는 지난달 27일 의회 승인을 거쳐 세이프를 통해 437억유로(약 74조2000억원) 규모의 차관을 도입하기로 확정한 바 있다. 세이프는 EU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조성한 총 1500억유로(약 254조7000억원) 규모의 무기 공동구매 기금이다. 하지만 이 자금을 사용하려면 비유럽권 부품 비중을 35% 이하로 제한하고, 원칙적으로 유럽산 무기만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폴란드에 책정된 금리는 3.17%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이러한 조건이 폴란드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 핵심 동맹국인 미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하는 길을 막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최근 이란 전쟁과 미국의 군사작전에서 미국산 장비의 성능이 입증됐다"며 유럽산보다 미국 무기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부터 친분을 과시해왔으며, 야당인 법과정의당(PiS) 등 우파 진영 역시 EU의 조건부 대출이 내정간섭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통령이 제시한 대안은 EU 차관과 비슷한 1850억 즈워티(약 73조5000억원)를 확보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조달 방식에 대해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말을 아꼈다. 다만 블룸버그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중앙은행이 보유 금을 고점에 매각해 차익을 실현한 뒤 저점에 재매입하는 방안을 대통령 측에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폴란드 중앙은행은 2018년부터 전략적으로 금을 매집해왔으며, 올해 1월 기준 보유량은 543.3t으로 전 세계 중앙은행 중 13위 수준이다. 이는 8년 전(128.6t)과 비교해 4배가량 불어난 규모로, 2024년 이후 국제 금값 급등으로 막대한 평가이익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내각은 대통령의 구상에 즉각 반발했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외무장관은 "금값 변동에 따른 손실 위험이 큰 만큼 이는 명백한 투기"라며 "유럽식 세이프가 더 안전하다"고 맞섰다. 안제이 도만스키 재무장관 또한 "지난 3년간 중앙은행 수익이 예산으로 전입된 적이 없다"며 실현 가능성을 일축했고, 아담 글라핀스키 중앙은행 총재는 국채 매입이나 준비금 활용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러시아의 우방인 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는 안보 위기감 속에 '방산 큰손'으로 떠올랐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0~2024년 폴란드의 무기 수입은 직전 5년 대비 508% 급증했다. 이 기간 도입한 무기의 45%는 미국산, 42%는 한국산으로 비유럽권 비중이 압도적이다.

현재 폴란드는 군 통수권과 법안 거부권을 쥔 대통령과 행정부 수반인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구조다. 민족주의 성향의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세이프 관련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판을 청구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유럽통합을 지향하는 도날트 투스크 총리와의 파열음은 계속될 전망이다.


윤영훈 기자 jihyunengen@finance-sco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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